한국 항공기와 외국 항공기, 승객 태도는 왜 다른가 | |
노동계약 빈틈을 비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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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을 봉지째 갖다줬다며 승무원에게 폭언을 해 물의를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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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장자가 빈 배를 두고 한 말이 있다. <장자> 외편에 나오는, 널리 회자되는 얘기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다가 빈 배에 살짝 부딪히게 되면, 그가 아무리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낼 까닭이 없다. 하지만 그 배에 사람이 있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소리를 치면서 난리를 치게 되고, 욕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배에 살짝 부딪혀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왜 한 번은 화를 내고 다른 한 번은 그러지 않는가? 장자가 이르기를, “앞에서는 노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노하는 것은, 앞서는 빈 배였지만 이번에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삶을 빈 배처럼 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없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장자가 설명하지 않은 게 있다. 부딪힌 배에 사람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항상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 배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사정은 달라진다. 지체 높은 분이 그 배에 있었다면, 빈 배에 부딪혔을 때 본능처럼 나올 ‘젠장’이라는 비명조차 내뱉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만만한 자가 있었다면, 욕설도 모자라 멱살마저 잡았을 터다. 결국 너와 나의 관계가 문제다.
빈 배에 지체 높은 분이 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 생활해나가는 곳이다. 노동과 임금이 자발적 의사에 기초해 교환되는 노동계약이 핵심적이다. 자발성과 자유 때문에 노예 ‘계약’과 구분된다.
하지만 노동계약에는 빈틈이 많다. 특정 액수를 받고 특정 시간 동안 일하기로 약속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정작 어떻게 일할지는 애매하다. 실제로 이를 특정해서 계약서에 일일이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를 ‘불완전계약’이라 부른다. 노동계약의 태생적 운명이다. 자유롭게 계약한 뒤 일터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확실성의 공간이 열린다.
노동계약의 빈틈에 존중과 성취가 자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횡, 권위, 규율 그리고 물리적·언어적 폭력이 밀고 들어서기도 한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는 신뢰와 협동으로 돌파하는 장그래의 영업팀도 있고, 부장의 발길질과 욕설로 움직이는 팀도 나온다. 성희롱까지 가세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자유로운 개인과 고용주의 계약이라는 노동계약이 팀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떠날 자유는 있지만, 이에 맞설 자유는 이론적일 뿐이다.
구입한 것은 인격 아니라 노동 서비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들은 경비원을 고용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노동 서비스를 산 것이다. 그들의 인격까지 산 것은 아니다. 노예계약이 아닌 까닭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험한 소리를 내뱉거나 무시하거나 홀대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하지만 노동계약의 빈틈 때문에 우리는 주인 행세를 한다. 저쪽 처지가 궁박해서 주인 행세를 용인해주면, 노동계약은 주종관계로 전환된다. 그래서 노동계약과 주종관계 사이의 간극은 그리 멀지 않다. 노동계약에서 노동자의 인격이 사라지는 이런 전환은 신속하고 쉽지만, 돌이키는 일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영화 ‘카트’에서 기업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항의하는 고객을 달래기 위해 대형마트 서비스 노동자에게 무릎을 꿇게 한다. ‘영화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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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은 고객에게도 홀대받기 마련이다. 영화 <카트>에는 마트에서 막무가내로 무시당하는 여성들이 나온다. 그녀들은 고객의 횡포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이 적나라한 이중 횡포를 영화는 충격적으로 그려낸다.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항의하는 고객을 달래기 위해 회사는 노동자를 고객 앞에 무릎 꿇게 한다. 고객은 기업을 통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을 배운다. 샴페인이 내 옷으로 쏟아졌다고 해서 승무원에게 욕지거리를 마음껏 해댈 수 있는 고객의 자유도 그렇게 나온다.
평소 땅콩을 즐기지도 않았을 일등석 승객이 땅콩을 문제 삼아 비행기를 돌렸다. 재벌녀가 벌인 일대 촌극만으로 볼 일은 아니다. 구멍 성성한 노동계약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비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녀도 딴에는 억울하겠다. 항공사의 고위 임원이 직원에게 소리 지르고 서류철을 던지고 하는 일은 <미생>에 나오는 일상이다. 그녀가 치명적으로 잊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기내에 고용주이자 승객으로 있었다는 점이다. 비행기는 일터이자 승객이 머무르는 공공의 공간이다. 후자를 잊었다. 하지만 망각은 우연이 아니다. 대대손손 고용주이다보니, 그녀에게 ‘인간의 자유로운 노동계약’이란 추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주종관계로의 전환은 오래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노동자 영혼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노동계약의 빈틈을 존중과 협력으로 채우는 기업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착한’ 기업의 결단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사정이 너무 엄중하다. 노동자는 노동계약 이전에 한 인간이고 존중받아야 할 시민이다. 노동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이런 권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자는 틀렸다. 빈 배로 살아갈 일이 아니라 배 안에 당당한 노동자 시민을 싣고 다녀야 할 일이다. 그래야 땅콩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할 수 있고, 고객 앞에 당당하게 친절할 수 있다. 당당하게 쉬면서, 며칠 밀린 신문도 뒤적거려볼 수 있다. 그러려면 생각과 힘을 모아야 한다. 불량기업에 대해서만 불매운동을 할 게 아니다. 정형화된 과잉 친절을 직원에게 강요하는 기업을 거부하고,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자신이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소비자일 뿐이다. 기업도 왕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 서비스와 자본을 잘 버무려 이윤을 내고자 할 뿐이다. 고객도 기업도 노동자의 영혼을 요구할 권리도, 파괴할 권리도 없다. 기업이 존중하지 않은 노동은 고객도 존중하지 않는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