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입맛 짜맞추기 실사…회계사들 ”도장 장사꾼으로 전락”
국내 회계법인은 인수·합병(M&A) 대상 기업의 자산을 실사하는 과정에서 객관성을 잃기 일쑤다. 비상장 주식, 전환사채, 재고 등 기업 자산을 평가할 때 기업 입맛에 맞추다보니 적정 인수가격을 산정하는데 실패하곤 한다.
회계법인 업계는 ‘감사보고서 작성은 독립성과 객관성이 중요하지만 자산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밝힌다. 그러다보니 인수·합병 과정에서 우발채무가 발생해 협상 당사자간 다툼이 생기는 사례가 허다하다. 심지어 회계법인의 자산평가 보고서가 기업 비리에 활용되는 일도 있다.
이로 인해 인수·합병의 사전 절차인 자산평가에 객관성과 검증 가능성을 확보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채이배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회계사)은 “회계사는 자산을 실사할 때 감사보고서처럼 객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회계법인이) 기업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실사보고서를 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주식 저가매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수십억대의 손해배상금을 물게 될 처지에 놓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1부(부장판사 윤종구)는 지난해 10월 말 “김 회장은 한화에 89억 6000여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경제개혁연대와 한화 소액주주들이 김 회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재판부는 “김 회장이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한화 에스엔씨 주식을 장남에게 매각하는 과정에 한화 경영기획실을 통해 주식가치를 저가로 평가할 것을 지시했다”고 판시했다.
이석채 전 KT 회장의 비리 수사에서도 ‘짜맞추기’ 가치평가 의혹이 제기됐다. KT는 지난 2012년 7월 77억5000만원을 투자해 교육콘텐츠 업체 사이버MBA(현 KT 이노에듀)의 지분 50.5%(174만9000주)를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KT가 회계법인에 자산평가금액을 미리 제시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사이버MBA는 이 전 회장의 8촌인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이 회장을 지냈고, 당시 지분을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연대는 KT가 사이버MBA를 계열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수십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며 이 전 회장을 고발했다. 검찰은 회계법인 관계자들을 소환해 이 전 회장이 사이버MBA 측에 특혜를 주기 위해 회계법인에 압력을 행사했는지 등을 추궁했다.
채이배 연구위원은 “자산평가는 감사보고서와 달라 금융당국이 검증할 순 없지만 사후 책임에 대해서는 금융당국이 행정처분을 해야 한다”며 “행정처분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므로 피해 주주가 주주대표소송을 쉽게 제기할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