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묵시적 청탁으로 엮으면 안 걸릴 기업 있겠나” 볼멘 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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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 청탁으로 엮으면 안 걸릴 기업 있겠나” 볼멘 재계

중앙일보 2017.08.29 01:00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된 근거인 ‘묵시적 청탁’ 때문에 재계가 혼란에 빠졌다. 묵시적 청탁을 확대 해석하면 법망이 걸리지 않을 행위가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재용 부회장 5년 선고 후폭풍
정경유착·정책협조 기준 따로 없고
순수한 후원도 오해 받을 소지 생겨

다음달 국세청 등 대대적 사정 예고
경제단체 ‘반기업 정서’ 확산 우려
“기업 후원에 대한 개념 재정립 필요”

지난 25일 법원은 “대통령에게 적극적·명시적으로 청탁을 하고 뇌물을 공여한 것이 아니라”면서도 “묵시적으로 부정한 청탁을 한 사실은 인정된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했다.
 
기업 입장에선 어디부터가 정부에 대한 ‘정책 협조’이고, 어디까지가 ‘정경유착’인지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그런데 법원은 뚜렷한 물증 없이 ‘묵시적 청탁’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부사장은 “각종 정책 사업과 스포츠 이벤트 등을 지원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며 “이것이 ‘정책 협조’인지 ‘정경유착’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특히 현안이 있는 기업이 순수한 의미에서 정부 정책에 동참해 지원금을 냈더라도 앞으로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진영논리로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선의의 협조’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묵시적 청탁’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재계 단체 관계자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한국전력 등이 800억원을 지원키로 했는데, 시각에 따라 이것도 ‘묵시적 청탁’으로 볼 수 있다”며 “묵시적 청탁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엮는다면 안 걸릴 기업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일부 기업들은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광복절 특사로 총수가 사면을 받은 SK·CJ, K스포츠 재단에 70억원을 추가 출연했다가 돌려받은 롯데,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과 친분이 있는 이동수씨를 전무로 취업시킨 KT 등에도 ‘묵시적 청탁’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정권과 기업 간의 ‘갑을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형량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잘 나가다가도 정권의 코드를 맞추지 못하면 한 순간 쇠락하는 게 한국 기업 경영의 현실이다. 전 정권에 밉보여 수난을 겪었던 CJ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 대기업 임원은 “국가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직접 요구하는 것을 기업 입장에서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느냐”며 “‘갑’의 부당한 요구를 ‘을’ 이 거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을’에게 중형을 선고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반기업 정서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도 많다. 일각에서는 기업인이면 증거가 부실해도 강력히 처벌하는 게 정의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에선 “기업을 ‘동네북’으로 만드는 모양새로 나아가고 있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고 섣불리 목소리를 냈다간 사정기관의 더 큰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는 걱정도 커졌다. 다음달 공정위의 ‘기업집단국’, 국세청의 ‘대기업·대자산가 변칙 상속·증여 태스크포스(TF)’ 등이 출범하는 등 주요 사정기관의 서슬이 더욱 퍼래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8월 28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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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의 1심 선고 결과가 나오자 한국경영자총협회만 경제 전반을 걱정하는 공식 논평을 냈을 뿐, 대한상공회의소·한국무역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등은 별도 입장표명을 하지 않은 게 대표적인 예다.
 
이번 기회에 기업의 후원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정치경제학 교수는 “투자·채용 등에 쓸 재원을 정부 압박으로 비효율적인 곳에 쓰는 경우가 많아 기업들의 불만이 컸다”며 “앞으로는 정부 스스로 각종 이벤트에 기업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말고, 기업도 최악의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런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향후 열릴 이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서는 ‘묵시적 청탁’ 여부와 대가성의 입증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삼성 측은 “묵시적 청탁과 대가성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며 이날 서울중앙지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특검도 명시적 청탁이 인정되지 않은 않은 점과 양형 근거 등을 살펴보기 위해 판결문을 집중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 역시 이번 주 중 항소장을 제출할 예정이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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