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겹눈으로 본 재계] 그깟 수십억 때문에 이사들 부를 수는 없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과 기업 투명경영

● 기업 기부금, 결정은 ‘짬짜미’ 회계 처리는 ‘깜깜이’
● 상당수 기업은 기부금 총액조차 공시 안 해
● 삼성·SK, 뒤늦게 ‘10억 이상’ 이사회 의결 의무화
● 기부 내역 상세 공개하는 강원랜드 본보기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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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결정문에서 “피청구인(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를 받은 기업은 현실적으로 이에 따를 수밖에 없는 부담과 압박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고, 사실상 피청구인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 요구에 대해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했을 뿐 아니라 기업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지난해 11월 20일 ‘최순실 게이트’ 수사 중간 결과 발표에서도 이영렬 검찰 특별수사본부장은 “기업들이 안종범 전 수석 등의 요구에 불응할 경우 각종 인허가상 어려움과 세무조사 위험성 등 기업 활동 전반에 걸쳐 직·간접적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 (두 재단에 대한) 출연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기업들엔 아직도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만든 일해재단 출연을 거절한 국제그룹이 수개월 만에 공중분해된 사실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를 감안해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강제 출연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공식적인 출연 절차를 거치고, 투명하게 회계 처리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단 한 주를 갖고 있는 개인도 그 회사의 주인이다. 주인으로서 당연히 자기 회사의 돈이 어떻게 지출되는지 알 권리가 있다. 또한 기업들은 기부금의 일정액을 세금공제 등으로 돌려받는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낸 기부금과 관련해 최대 187억 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국민 세금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도 기업이 기부금으로 어디에 얼마를 지원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

신동아는 미르재단에 486억 원, K스포츠재단에 288억 원 등 총 774억 원을 출연한 53개 기업에 대해 출연 절차와 회계 처리 여부를 확인했다. 결과는 투명경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주주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53개 기업 가운데 10억 원 이상을 낸 기업이 23곳에 이른다. 10억 원이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이사회 등 사내 공식 의결기구를 통해 출연 절차를 밟은 기업은 포스코와 KT 2곳에 불과했다.

이사회 의결 거쳤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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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관련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 총수들. [동아 DB]

포스코는 ‘1억 원 초과 10억 원 이하 기부 찬조는 이사회에 부의하여야 하고, 10억 원을 초과한 기부 찬조는 이사회에 앞서 재정 및 운영위원회(사내이사 2명과 사외이사 3명으로 구성)에서 사전 심의하고 이사회에서 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fss.or.kr)을 통해 확인한 결과 포스코는 미르재단에 대해 2015년 11월 6일 열린 이사회에서 출연을 의결했고, K스포츠재단에는 2016년 1월 28일 열린 이사회에서 출연을 의결한 것으로 공시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K스포츠재단 출연금은 재정 및 운영위원회에서 사전 심의가 이뤄졌지만 미르재단에 대해서는 재정 및 운영위원회의 사전심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전 심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포스코는 “이사회 운영 규정상에 ‘이사회를 소집할 여유가 없을 때에는 해당 사항에 대해 사전에 동의를 얻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다음 이사회에 보고해 그 승인을 얻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며 “미르재단 출연 건은 해당 사안에 대해 사전에 사외이사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 2015년 11월 이사회에서 가결했다”고 해명했다. 공시 내용엔 이사회에서 결의한 사실만 나와 있고, 구체적인 출연액수는 나와 있지 않았다.

KT도 이사회 규정에 ‘10억 원 이상의 출연 또는 기부’는 반드시 이사회를 열어 결의하도록 하고 있다. KT 측은 “미르재단 출연은 2015년 12월 10일 열린 12차 이사회에서 의결을 거쳤다”며 “2015년 사업보고서에 그 내용이 공시돼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시 내용은 ‘후원금 출연(안) 원안 가결’이라고 돼 있을 뿐 구체적인 출연처와 출연금은 기재돼 있지 않았다.

대표이사 전결 사항

이와 관련해 KT새노조는 “12차 회의에서 결의한 ‘후원금 출연안’은 전혀 다른 재단으로 판단한다”며 황창규 회장을 배임횡령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에 대해 KT는 “외부로 공개할 수는 없지만 미르재단 출연이 적시된 구체적인 이사회 회의록이 있다”고 해명했다. 2015년 사업보고서에 기재된 1년 동안 이사회 논의 사항 중에 ‘후원금 출연’ 항목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회사들은 “기부금 결정은 이사회에서 논의할 사항이 아니고, 공시 규정에 해당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기부 금액이 수백억 정도라면 몰라도 회사 매출의 0.01%도 안 되는 수십억 원 때문에 이사회를 열어 바쁜 이사들을 모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항변하는 회사도 있었다.

기업들은 “기부금을 회사 내규에 따라 처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정관 등에 따라 재무위원회, 투명경영위원회 등 사내 공식 절차를 통해 출연을 결정한 기업은 대림산업,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롯데케미칼 정도에 불과했다. 대림산업은 기부금 및 찬조금이 20억 원 이상이면 이사회 승인을, 5억 원 이상 20억 원 이하는 재무위원회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림산업의 미르재단 출연금은 6억 원이기 때문에 2015년 10월 30일 재무위원회 승인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경 주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을 할 때 관련 사실을 이사회에서 공유해 잠재적 리스크를 관리하자는 취지로 이사회 산하에 투명경영위원회(현대모비스는 윤리위원회)를 설치했다. 현대자동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모두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출연하면서 투명경영위원회(윤리위원회)에 문서로 보고했다고 밝혔지만 입증 자료는 공개하지 않았다.

롯데그룹도 “롯데케미칼은 경영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처리했으며, 호텔롯데도 임원회의 때 보고하고, 통과했다”고 답변했지만, 입증자료는 공개하지 않았다. SK그룹 역시 “외부로부터 기부금 등의 요청이 오면 그룹 사회공헌위원회에서 검토를 거쳐 각 계열사에 이를 제안하고, 해당 계열사는 내부 의사결정을 거쳐 기부금 집행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면서도 자세한 내부 의사결정 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기부금’ 액수는 몰라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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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를 비롯해 기부금을 출연한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모두 “내부 프로세스를 밟아 정상적으로 처리했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LG그룹을 비롯한 나머지 기업들은 ‘대표이사 전결’이나 ‘해당 부서장의 전결’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답변했다.계열사별로 출연금을 나눠 집행한 그룹도 많았다. GS그룹은 GS칼텍스 등 8개 계열사가 나눠서 미르재단 26억 원, K스포츠재단 16억5000만 원을 출연했다.

LG그룹도 LG화학 등 8개 계열사가 나눠서 미르재단 48억 원, K스포츠재단 30억 원을 출연했다. LS그룹은 4억9000만 원을 6개사가 수천만 원씩 쪼개 K스포츠재단에 출연했다. LG그룹과 LS그룹은 “규모가 큰 기부금은 계열사별로 매출 규모와 경영 상태를 종합해 배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출연 절차가 불투명한 것처럼 회계 처리 역시 불투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53개 기업 중 전자공시시스템에 올라 있지 않은 LS니꼬동제련과 부영을 제외한 51개 기업의 출연 시점 사업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별도로 공시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대부분 해당 보고서 재무제표 주석 한 귀퉁이에 있는 ‘기부금’ 항목 총액에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금이 포함돼 있다고 해명했다.

그나마 재무제표 주석에 기부금 항목조차 없는 기업도 한화(15억 원 출연), GS건설(7억8000만 원), CJ(5억 원) 등 9곳이나 됐다. LG그룹은 LG화학(48억9000만 원) 등 4개사나 됐다. 회계 처리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에스원 등 일부 기업은 “분기 보고서나 반기 보고서에는 기타비용으로 잡았다가 사업 보고서에는 기부금으로 처리한다”고 해명하는가 하면, LS그룹처럼 “기부금 항목이 미미한 경우 기타항목으로 잡고, 지주사에서 기부금 항목으로 일괄처리한다”는 곳도 있었다. 한화와 LG그룹은 “상법에 기부금을 둬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며 “회사 원칙에 따라 회계 처리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0억 이상 이사회 의결키로

경제개혁연대는 미르·K스포츠재단 사태와 관련해 “기업의 기부활동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취지에 맞게 규모와 용도를 결정하고 집행해야 하며, 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해 적정성을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업들도 늦었지만 기부금 운영 투명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1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이나 후원금, 출연금 등을 낼 때는 반드시 이사회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또한 이사회에서 결정한 모든 후원금과 사회공헌기금에 대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시한다는 방침이다. 다른 삼성 계열사들도 뒤따를 전망이다.

SK그룹도 10억 원이 넘는 후원금은 이사회 의결을 거쳐 집행하고, 이를 외부에 공개하기로 정관을 개정했다. LG그룹도 “기부금과 출연금 등에 대해 투명성과 합리성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며 “국내외 사례를 참고해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부금 투명성과 관련해 강원랜드는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강원랜드는 자사 홈페이지 ‘경영공시’ 코너에 ‘연간 출연 및 증여’에 대한 연도별 상세 내용이 국민이 확인할 수 있도록 기록돼 있다. 몇 천만 원 이상 기부·출연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업들이 자사 홈페이지에 이 정도 정보공개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경영과 회계투명성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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